모란이 그 모란이 아니네

미뤄둔 일을 해결하러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나섰다. 별내역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고 첫 번째 목적지인 천호동으로 향하는 길. 문득 노선도를 바라보다 전철의 종착역인 ‘모란역’에 시선이 멈췄다.
구리시를 지나 한강을 건너고, 강동과 송파를 거쳐 성남까지 이어지는 8호선. ‘모란’이라는 이름을 보며 나는 당연히 화려하게 피어나는 ‘모란꽃’을 떠올렸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전통 5일장인 ‘모란시장’의 이름도 대개 그 꽃에서 유래했을 거라 짐작해 왔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유래가 궁금해져 스마트폰을 켜고 검색을 해보았다. 결과는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아니, 이거 뭐람! 완전 대박이다."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모란이라는 지명은 예쁜 꽃 이름이 아니라, 이북에 있는 평양의 ‘모란봉’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흥미로운 이름의 시작은 196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곳을 일구기 시작한 이들은 다름 아닌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이었다. 척박한 땅을 개척하며 마음 둘 곳 없던 그들이, 두고 온 고향 땅 평양과 모란봉을 그리워하며 동네 이름을 ‘모란’이라 짓고 시장을 열었던 것이다.
꽃처럼 화려한 이름 뒤에 실향민들의 깊은 애환과 땀방울이 숨어 있었다니, 차창 밖 풍경이 어쩐지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모란' 이름의 유래
"평양에 대한 그리움: 시장을 처음 일군 인물(김창숙 등)이 북녘에 두고 온 고향인 평양의 '모란봉(모란각)'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모란'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 모란개척단: 1960년, 제대군인과 실향민들이 현재의 경기도 성남시 모란역 네거리 일대의 황무지를 개척하며 '모란개척단'을 결성하였고, 이 지명이 시장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시장의 성장 과정
• 탄생: 초기에는 개척민들을 위한 작은 장터로 출발했습니다.
• 전국 최대 규모로 발전: 1978년 전국적인 고추 파동 시기에 전국의 상인과 주부들이 몰려들면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민속 5일장으로 급성장했습니다.
• 개장일: 매월 끝자리 4일, 9일 (4일, 9일, 14일, 19일, 24일, 29일)에 열리는 5일장입니다."
강동에서 오래 살았고 모란시장도 가끔 다녔으니 잘 안다고 생각했다.
종착역 이름이 눈에 들어와 찾아본 유래는 가벼운 호기심을 넘어 뜻밖의 인연과 깊은 감회로 이어졌다.
생각해 보면 모란시장은 내 삶의 물길을 돌려놓은 시작점이기도 하다.
지금 고향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게 된 것도, 그 옛날 모란시장에서 염소를 사다 기르기 시작한 것에서 출발했으니 말이다.
무심코 스쳐 지나간 장소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모란시장이라는 이름이 단단히 얽혀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인연이 깊은 곳이건만, 정작 그 이름에 담긴 진짜 속내를 이제야 알았다.
낭만적인 꽃 이름인 줄로만 알았던 '모란'에는, 사실 전쟁으로 고향을 잃고 맨주먹으로 황무지를 일구어낸 실향민들의 눈물겨운 개척사가 숨어 있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평양 모란봉을 그리워하며, 낯선 땅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오늘의 터전을 일구어낸 그 치열한 정서와 마주하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진다.
무엇이든 쉽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세상에서, 모란시장이라는 이름 뒤에 흐르는 뜨거운 역사는 단순한 지명 이상의 경외감을 준다.
그 척박한 세월을 이겨낸 이들의 악착같은 생명력이 오늘따라 유독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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